요약이 끝난 자리에서,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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AI가 17쪽을 만들어줬는데 팀장은 “그래서 뭘 하자는 거예요”라고 물었다

① 오후 3시, 17쪽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

회의실에서 답하지 못한 3초
회의실에서 답하지 못한 3초

회의실 프로젝터에 17쪽짜리 보고서가 떠 있었어요. 시장 동향, 경쟁사 움직임, 소비자 트렌드. 김수현 대리는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어요.

팀장이 물었어요.

“그래서 우리는 뭘 하자는 거예요?”

수현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어요. 화면에는 분명 답이 될 만한 게 잔뜩 있었는데, 그중 무엇 하나를 골라 “이걸 하시죠”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. 그러니까, 자료는 있고 답이 없었어요.

“조사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.”

말해놓고 스스로도 이상했어요. 뭘 더 조사해야 하는지 자기도 몰랐거든요. 회의는 4시에 다시 모이기로 했어요. 이번 주 광고 슬롯 마감이 걸려 있었어요. 40분이 남았어요.

② 수현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게 더 문제였다

AI가 줄여준 칸과 일이 끝나는 칸 — 삼성SDS 국내 직장인 630명 조사(2026.01)
AI가 줄여준 칸과 일이 끝나는 칸 — 삼성SDS 국내 직장인 630명 조사(2026.01)

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. 수현은 게으르지 않았어요. 오히려 반대예요.

원래 이틀은 잡아야 했을 조사를 반나절에 끝냈거든요. 리포트를 찾아 읽고, 기사를 훑고, 표를 정리하는 그 과정을 AI가 확 줄여줬어요. 생활용품 마케팅 4년차, 수현은 그 도구를 꽤 잘 쓰는 축에 들었어요.

숫자로 봐도 그래요. 삼성SDS가 국내 직장인 630명에게 물었더니 AI로 업무시간이 줄었다는 응답이 73%였어요. 시간이 줄었다고 답한 사람들 중에서도 60.2%는 하루 1시간 넘게 줄었다고 했어요. 가장 크게 줄어든 영역은 자료·정보 조사 및 요약, 72.4%였어요.

수현은 정확히 그 72.4%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. 시키는 대로 잘한 거예요.

문제는 잘못한 데 있지 않았어요. 잘한 지점에서 그대로 멈춰 선 데 있었어요. 조사가 끝난 자리를 도착점이라고 착각한 거죠.

③ “조사를 더 해보겠습니다”가 만든 24쪽

17쪽이 24쪽이 됐다
17쪽이 24쪽이 됐다

자리로 돌아온 수현이 한 일은 단순했어요. 아까 그 요약본을 그대로 붙여넣고 한 줄을 덧붙였어요.

“이걸 바탕으로 전략을 제안해줘.”

3분 뒤 답이 왔어요. 차별화 전략. 디지털 전환. 타겟 세분화.

읽어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어요. 그런데 우리 회사 얘기도 하나도 없었어요. 어느 회사에 갖다 붙여도 어울릴 문장들. 수현네 팀이 다음 주에 뭘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안 적혀 있었어요.

그래도 뭐라도 채워야 할 것 같아서 표를 만들고 근거를 덧붙였어요. 17쪽이 24쪽이 됐어요. 분량은 늘었고 답은 더 흐려졌어요.

참고로 같은 조사에서 AI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늘었다고 답한 사람도 5.6% 있었어요. 그 5.6%가 꼽은 1위 이유는 AI가 지어낸 내용을 다시 손보는 일, 60%였어요. 수현의 24쪽은 그 경우까지는 아니었지만, 늘어난 페이지가 곧 진전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슷했어요.

시계는 3시 20분을 지나고 있었어요.

④ 24쪽을 넘기다 튀어나온 혼잣말

“우리 그 채널 못 쓰는데” — 그 말은 자료 어디에도 없었다
“우리 그 채널 못 쓰는데” — 그 말은 자료 어디에도 없었다

수현이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어요.

“우리 그 채널 못 쓰는데.”

혼잣말이었어요. 그리고 말해놓고 얼어붙었어요.

방금 그 문장. 24쪽 어디에도 없어요. 자료에 없어요. 수현 머릿속에만 있어요.

분기 예산 상한이 있다는 것. 새 채널은 못 연다는 것. 오프라인 유통 비중이 크다는 것. 작년 4분기 인플루언서 캠페인이 엎어져서 팀장이 그 방식을 싫어한다는 것.

전부 수현만 아는 사실이었어요.

AI에게는 세상을 물었어요. 우리 사정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. 조건을 모르는 상대에게 답을 시킨 거예요. 그러니 어느 회사에나 맞는 답이 나왔죠.

하나 더 있었어요.

수현은 계속 결론을 물었어요. 물어봐야 할 건 그게 아니었어요. 내 결론을 내놓고, 그걸 깨보게 했어야 했어요.

⑤ 수현이 3시 40분까지 한 세 가지

남은 20분에 수현이 한 건 딱 세 가지였어요.

1단계 — 결론을 내가 먼저 쓴다.

AI를 켜기도 전에 메모장을 열었어요. 한 줄만 썼어요.

내 결론: 이번 주는 가격으로 맞붙지 말고, 기존 고객이 떠나지 않게 하는 쪽에 예산을 쓴다.

틀려도 상관없는 한 줄이에요. 맞히려고 쓴 게 아니라, 반박당할 과녁이 필요해서 쓴 거니까요. 이 단계는 틀릴 자유를 얻는 단계예요.

2단계 — 자료 말고 제약을 준다. 선택지는 ‘포기하는 것’과 한 세트로 받는다.

아래 자료는 내가 출처와 날짜를 직접 확인한 것들이야. 내 결론은 “이번 주는 신규 확보 대신 기존 고객 이탈 방지에 예산을 몰자”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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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 상황은 이래. 분기 예산 상한이 있고, 신규 채널은 못 연다. 오프라인 유통 비중이 크다. 작년 4분기 인플루언서 캠페인이 실패해서 팀장이 그 방식에 부정적이다. 목표는 이번 주 안에 실행에 들어가는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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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제약 안에서 가능한 대응안을 2~3개만 뽑아줘. 각 안마다 ① 위 자료에서 확인되는 근거 ② 기대 효과 ③ 이 안을 고르면 포기해야 하는 것 ④ 실행 전에 확인해야 할 가정 ⑤ 오늘 결정해야 할 사항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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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료에 없는 내용은 추정하지 말고 ‘확인 필요’라고 표시해. 최종 선택은 하지 마. 고르는 건 내가 한다.

포기할 것을 같이 받는 게 핵심이에요. 얻는 것만 적힌 목록은 비교가 안 되고, 비교가 안 되면 그건 선택이 아니라 나열이에요. 포기와 묶여야 비로소 결정이 돼요.

돌아온 건 2개 안이었어요. A안은 기존 구매 고객 대상 체험팩 발송, B안은 오프라인 매대 프로모션. 몇 군데는 ‘확인 필요’라고 표시돼 있었어요. 수현은 A안을 골랐어요. 이번 주 안에 실행할 수 있고, 기존 고객이 떠나지 않게 하는 쪽이라는 자기 기준에 A안이 더 가까웠거든요.

3단계 — 회의실에서 맞을 매를 미리 맞는다.

네가 내 팀장이라고 생각하고, 이 A안을 회의에서 깨보려고 해봐. 가장 아픈 질문 5개만. 답은 쓰지 말고 질문만.

질문 5개가 왔어요. 두 개는 수현이 읽자마자 답할 수 있었어요. 세 번째에서 걸렸어요.

“체험팩 물류 비용은 누가 대나요?”

말문이 막혔어요. 그래서 그것만 물류팀에 전화해서 확인했어요. 통화는 4분 걸렸어요.

이 단계는 회의실에서 맞을 매를 미리 맞아두는 단계예요. 미리 맞으면 그 자리에서는 안 맞아요.

⑥ A4 한 장

24쪽 대신 A4 한 장
24쪽 대신 A4 한 장

4시. 수현은 24쪽을 들고 가지 않았어요.

A4 한 장이었어요. 거기에 네 줄만 있었어요.

  • 추천안 한 줄
  • 근거 세 줄
  • 이 안을 고르면 포기하는 것 한 줄
  •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될 신호 한 줄

수현이 말했어요.

“가격 인하 대신 기존 고객 체험팩을 제안합니다. 오늘 대상 고객만 확정하면 금요일 집행 가능합니다.”

팀장이 답했어요.

“그럼 그걸로 갑시다.”

10분 만에 끝났어요. 이번 주 광고 슬롯은 지켰어요.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, 주간 대응안을 뽑아 오는 일이 수현의 몫이 됐어요.

앞의 조사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어요. AI로 아낀 시간이 어디로 옮겨갔는지 물었더니 1위가 기획·전략 수립 40.2%, 2위가 의사결정 지원 32.2%였어요. 아낀 시간이 결국 판단하는 일로 흘러간다는 뜻이에요.

한편 캐럿글로벌이 기업 약 300개사를 조사한 결과 생성형 AI 도입률은 61.1%였고, 전사 차원까지 내재화한 곳은 6.7%였어요. 도구는 깔렸고, 일하는 방식은 아직 따라가는 중인 셈이에요. (표본이 다른 조사라 두 숫자를 이어 붙여 읽지는 마세요.)

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2026년 조사에서는 AI 활용 능력이 개인 커리어 경쟁력 요소 2위로 꼽혔어요. 42.3%였어요.

오늘 당장 해볼 건 세 가지예요. AI를 켜기 전에 내 결론 한 줄 쓰기. 자료 대신 우리 팀 제약을 알려주고 포기할 것과 묶어서 안을 받기. 마지막으로 그 안을 깨는 질문 5개를 시켜보기.

요약이 끝난 자리는 결승선이 아니라 출발선이다.

이 글은 시리즈 1편입니다

「AI 활용 레벨업」은 AI가 줄여준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씩 올라가는 이야기예요. 이번 편은 조사·요약에서 멈춘 자리를 다뤘어요.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부터 보고 싶다면 당신의 AI 활용은 지금 몇 단계입니까를 먼저 읽어보세요.

이 글에는 제휴 링크가 없습니다. 이번 편의 사건에 장비가 맡을 역할이 없어 넣지 않았어요.

인용한 세 조사(삼성SDS 국내 직장인 630명 / 캐럿글로벌 기업 약 300개사 / 대학내일20대연구소 2026)는 표본이 서로 다릅니다. 숫자를 합치거나 인과로 이어 읽지 마세요. 김수현 대리의 회사·제품·경쟁사는 설명을 위한 가상 설정입니다.